개성 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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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개성 왕씨는 고려를 건국한 왕족의 성씨로, 고려 태조 왕건의 집안에서 기원한다. 고려 멸망 후 조선 왕조의 탄압으로 인해 많은 왕씨들이 살해당하고, 살아남은 이들은 성을 바꾸어 생존을 도모했다. 조선 시대에도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으며, 정조 때 일부가 왕씨로 다시 환성했다. 현재는 대한민국에 2만 명 이상의 인구가 있으며, 개성, 연천, 이천, 시흥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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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왕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가문 | 왕가 |
국가 | [[File:Royal flag of Goryeo (Bong-gi).svg|border|25px]] 고려 |
민족 | 한민족 |
주가 | 고려왕, 해동천자 |
칭호 | 해당사항 없음 |
경칭 | 해당사항 없음 |
영지 | 개성시 |
창건 | 9세기 |
단절 | 해당사항 없음 |
멸망 | 해당사항 없음 |
가조 | 왕국조 |
마지막 당주 | 해당사항 없음 |
현재 당주 | 해당사항 없음 |
저명한 인물 | 고려 왕 왕건 왕식렴 왕상은 |
분가 | 해당사항 없음 |
각주 | 개성왕씨중앙종친회 |
![]() | |
씨족 정보 | |
성씨 | 개성 왕씨 (開城王氏) |
관향 | 개성시 |
시조 | 왕국조(王國祖) |
원시조 | 왕건(王建) |
집성촌 | 해당사항 없음 |
인물 | 왕평달 선비 왕씨 왕식렴 왕함윤 경원공 왕방연 왕희걸 왕상은 왕종명 |
년도 | 2015년 |
인구 | 22,452명 |
순위 | 해당사항 없음 |
비고 | 고려의 왕족 성씨 |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 LST_158_029_0288 |
2. 기원
개성 왕씨는 왕건의 집안으로, 송악(지금의 개성시) 호족이었다. 원래 송악 지방에 대대로 살아온 호족으로, 이후 고려 왕을 포함한 고려 왕족의 성씨였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가 멸망한 후, 조선의 정치적 보복으로 많은 개성 왕씨가 박해를 받고 살해당했으며, 남은 사람들은 전, 옥, 금 등으로 성을 바꾸었다. 그러나 정조 때 일부는 왕씨로 성을 회복했다.
2. 1. 고려 왕실
고려 의종 때 김관의가 왕건의 족보를 채집해 기록한 고려편년통록(高麗編年通載)에 의하면, 고려를 세운 왕건의 증조모 정화왕후 강씨(貞和王后 康氏)는 고구려계 신라 사람인 강충(康忠)의 증손녀이자 고구려 출신의 신라 장군 강호경(康虎景)의 증손녀이다. 왕건은 집안 가계상 고구려의 먼 후손에 해당한다.[4][5]원래는 송악 지방에 세거해 온 호족으로, 이후 고려 왕을 포함한 고려 왕족의 성씨였다.
2. 2. 당 황실 후예설
고려 의종 때 김관의가 왕건의 족보를 채집해 기록한 고려편년통록(高麗編年通載)에 따르면, 왕건의 집안은 가계상 고구려의 먼 후손에 해당한다.[4][5]고려 때 관찬된 정사인 편년통록(編年通錄)에 의하면 왕건의 조부 작제건(作帝建)은 당 숙종의 아들로 서술하고 있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한림학사(翰林學士)가 "왕의 선조께서 당 숙종에게서 나왔다고 하던데 어디에 근거한 바입니까? 숙종은 어려서부터 대궐 문을 나오지 않았고 안록산의 난 때 영무(靈武)에서 즉위하였으니 어느 때에 동쪽으로 와서 아들을 두기에 이르렀겠습니까?"라고 질문하자, 왕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답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민지가 곁에 있으면서 "그것은 우리나라 역사에 잘못 쓰였을 뿐입니다. 숙종이 아니고 선종입니다."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당 선종 역시 생전에 장안 일대를 벗어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당 황실 후예설은 신빙성이 낮다.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 역시 《왕대종족기》를 저술하면서 당 황실 후예설을 부정하였다. 조선 세종 때 정인지 등이 고쳐 쓴 고려사에는 작제건이 선종의 아들로 나온다.
3. 분파
고려 태조의 아들 동양군 왕원(垣)을 파조로 하는 동양군파,[1] 고려 현종의 아들 평양공 왕기(基)를 파조로 하는 평양공파,[2] 고려 신종의 아들 양양공 왕서(恕)를 파조로 하는 양양공파,[3] 고려 고종의 아들 안경공 왕창(滄)을 파조로 하는 안경공파,[4] 고려 충정왕의 아들 시중공 왕제(濟)를 파조로 하는 시중공파[5] 등이 있다.
현존하는 개성 왕씨의 90% 이상은 고려 개국공신 삼중대광(三重大匡) 유검필의 딸이자 고려 태조의 제9비인 동양원부인의 아들 효은태자의 후손이다.[6]
4. 항렬자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
상(相) | 규(奎) | 치(治) | 병(炳) | 종(鍾) |
5. 고려 멸망 이후
조선 태조가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킨 후, 정치적 보복으로 개성 왕씨를 박해하고 살해했다. 많은 개성 왕씨가 죽임을 당했고, 남은 사람들은 전, 옥, 금 등으로 성을 바꾸었다. 하지만 조선 정조 때 일부는 왕씨로 다시 성을 회복했다.[6]
5. 1. 조선 왕조의 지속적인 감시
조선 태조 원년(1392년) 7월 20일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 등이 고려 왕조의 왕씨를 밖에 두기를 청하자, 조선 태조는 일부 왕씨를 제외하고 강화(江華)와 거제(巨濟)에 나누어 두게 하였다. 같은 해 8월 20일에는 고려 왕씨들의 노비의 수를 줄였다. 살아남은 왕씨들은 죽음을 피하려 전씨(田氏) 등으로 성씨를 바꾸기도 하였다.조선 태조 2년(1393년) 5월 26일에는 왕명에 따라 거제로 보내졌던 왕씨 일족을 모두 육지로 나오게 해서 완산(完山), 상주(尙州), 영해(寧海)에 나누어 거처하게 하였다.
조선 태조 3년(1394년) 1월 17일, 김가행(金可行)과 박중질(朴仲質)의 역모 사건으로 다시 일부 왕씨들을 거제도로 옮겼다. 이와 관련하여 왕씨를 제거하자는 상소가 여러 차례 올라왔으나 조선 태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대간과 형조에서 정사(政事)를 보지 않는 시위를 하자, 결국 일부 왕씨들을 귀양보냈다. 조선 태조는 사헌부에 강화에 살고 있는 왕씨 중 늙은이와 약한 자를 보살피라 명령하기도 했다.
조선 태조 4년(1395년) 4월, 왕씨를 죽이라는 상소가 계속되자 결국 조선 태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함부림 등이 삼척으로, 오몽을 등이 강화도로, 심효생 등이 거제도로 왕씨를 제거하려 보내졌다. 이들은 강화와 거제도 등지에 있던 왕씨 일족을 죽이고,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목을 베었다. 같은 해 4월 26일, 고려 왕조에서 왕씨로 사성된 일족들은 모두 본성으로 돌아가게 했으며, 왕씨를 가진 사람은 고려 왕실의 후예가 아니더라도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하였다.
조선 태조 6년(1397년) 12월 1일에는 왕씨의 서얼들이 성명을 바꾸고 지내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12월 8일에는 왕씨의 서얼 약사노(藥師奴)가 교살(絞殺)되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년) 11월 15일, 왕휴(王庥)의 아들 왕거을오미(王巨乙吾未)가 붙잡혔으나, 여러 정황을 고려하여 석방되었다. 조선 태종은 "금후로는 왕씨의 후손이 혹은 스스로 나타나거나, 혹은 남에게 고발을 당하는 자는 아울러 자원(自願)하여 거처(居處)하는 것을 들어주어서 그 삶을 평안하게 하라."라고 하교하였다.[6] 그러나 왕거을오미를 죽이라는 상소가 계속 올라왔지만 기각되었다.
조선 태종 16년(1416년) 11월 1일에는 왕상우(王上尤)가 왕씨의 후예라는 이유로 고발되었으나, 5일에 그 아우 왕화상(王和尙)과 함께 풀려났다.
조선 문종 1년(1450년) 11월 1일과 6일에 왕씨의 후예를 찾아 제사를 받들게 할 것을 명하였다. 얼마 뒤, 제우지(齊牛知)라 변성하여 공주에 숨어살던 왕우지(王牛知)가 붙잡혔으나, 조정에서는 오히려 숭의전 부사(崇義殿副使)라는 관직을 내려주고, 왕순례(王循禮)라는 이름도 내려주었다.
멸족령을 피해 왕씨들이 王과 비슷한 글자인 田, 全, 玉, 車, 申 등으로 변성하였다는 설이 있다.
5. 2. 왕씨 복성 시도와 좌절
조선 태조 원년(1392년) 7월 20일, 사헌부 대사헌 민개 등이 고려 왕조의 왕씨를 외지에 두기를 청하자, 조선 태조는 순흥군 왕승과 그 아들 강, 정양군 왕우와 그의 아들 조·관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강화와 거제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같은 해 8월 20일에는 고려 왕씨들의 노비 수를 줄였다. 혹자는 죽음을 면하기 위해 전씨(田氏) 등으로 성을 바꾸기도 했다.2년 5월 26일, 왕명에 따라 도평의사사에서 경상도 안렴사와 거제 병마사에게 공문을 보내 거제로 보내졌던 왕씨 일족을 모두 육지로 나오게 하여 완산, 상주, 영해에 나누어 거처하게 하였다.
3년 1월 17일, 김가행과 박중질이 점쟁이에게 공양왕과 왕씨의 명운을 물은 역모 사건이 발생하자, 다시 일부 왕씨들을 거제도로 옮겼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대간과 형조에서 왕씨 제거를 청하는 상소가 여러 차례 올라왔으나, 조선 태조는 이를 모두 거절하였다. 그러나 대간과 형조에서 정사를 보지 않는 시위를 하자, 결국 왕강은 공주로, 왕격은 안변으로, 왕승보는 영흥으로, 왕승귀는 합포로 귀양 보내졌다. 조선 태조는 2월 27일에 사헌부에 강화에 살고 있는 왕씨 중 늙은이와 약자를 보살피라는 명령을 내렸다.
4월 1일과 10일에 또다시 왕씨를 죽이라는 상소가 올라왔고, 4월 14일에 다시 상소가 올라오자 마침내 받아들여졌다. 중추원 부사 정남진과 형조 의랑 함부림은 삼척으로, 형조 전서 윤방경과 대장군 오몽을은 강화도로, 형조 전서 손흥종과 첨절제사 심효생은 거제도로 왕씨를 제거하려 보내졌다. 4월 15일, 윤방경 등은 강화에 있던 왕씨 일족을 강화 나루에 빠뜨려 죽였다. 4월 17일에는 공양왕 일가가 살해되었으며, 4월 20일에는 손흥종 등이 거제도에 있던 왕씨 일족을 바다에 빠뜨려 죽였고, 같은 날에 왕씨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이들을 모두 목 베었다.
4월 26일, 고려 왕조에서 왕씨로 사성된 일족들은 모두 본래 성씨로 돌아가게 했으며, 왕씨를 가진 사람은 고려 왕실의 후예가 아니더라도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하였다.
6년 12월 1일에는 왕씨의 서얼인 백안, 연금, 금만이 성명을 바꾸고 지내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12월 8일에는 역시 고려 왕씨의 서얼인 약사노가 교살되었다.
조선 태종 13년 11월 15일, 왕휴의 아들 왕거을오미가 붙잡혔다. 왕휴가 공주 사람 이밀충의 누이를 첩으로 맞아 낳은 아들이 왕거을오미였다. 태조 3년에 왕씨가 도륙당할 때에는 그 어미가 무지하였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여러 왕씨의 후손들이 중이 되어 산으로 도망갔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 사찰을 조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같은 해 11월 26일, 왕거을오미는 석방되었고, 태종은 "금후로는 왕씨의 후손이 혹은 스스로 나타나거나, 혹은 남에게 고발을 당하는 자는 아울러 자원하여 거처하는 것을 들어주어서 그 삶을 평안하게 하라."라고 하교하였다.[6] 그러나 11월 29일과 12월 1일에 왕거을오미를 죽이라는 상소가 올라오기도 하였으나 기각되었다.
16년 11월 1일, 왕상우가 왕씨의 후예가 이수라는 자의 여종과 혼인하여 낳은 자식이라고 하여 그 주인 이수에 의해 고발되었다. 5일에 그 아우 왕화상과 함께 풀려났다.
조선 문종 1년 11월 1일과 6일에 왕씨의 후예를 찾아 제사를 받들게 할 것을 명하였다. 얼마 뒤, 제우지라 변성하여 공주에 숨어살던 왕우지가 이웃 사람과 밭 경계를 가지고 다툼을 벌이다가 이웃 사람이 관가에 왕씨라고 밀고하여 붙잡혀 오게 되었는데, 오히려 조정에서는 숭의전 부사라는 관직을 내려주었다. 뒤에 왕순례라는 이름도 내려졌다.
멸족령을 피해 왕씨들이 王과 비슷한 글자인 田, 全, 玉, 車, 申 등으로 변성하였다는 설이 있다. 왕제구 개성왕씨중앙종친회 사무국장은 "그런 설이 있다. 하지만 다 그렇다는 확신은 없다."고 했다.
6. 환성(換姓)
1918년에 발행된 무오보에 옥(玉)씨 성을 쓰던 일파가 환성한 것이 유일하다고 왕제구 사무국장은 밝혔다.[1] 본래 고려 왕실에서는 태자를 제외한 왕자들을 승려로 출가시키거나, 아니면 모친의 성을 따르게 해서 왕권에 피해를 주지 못하게 했다.[1] 그러므로 현재 고려 성원록을 보면, 유(柳)씨, 임(林)씨, 이(李)씨 등등 외가의 성을 따른 왕자들이 많다.[1] 그래서 현재 이 성씨들 중 고려 왕실의 후손이 있다는 얘기도 있다.[1] 대표적으로 고려 희종의 손자 '광평공 혜'의 아들이 모친의 성을 따서 유(柳)씨가 되었고 약목 유(柳)씨 (후에 '문화 유(柳)'씨로 합보되어 곤산군파가 되었으나 문화 유씨와 혈연적 관계는 없음)가 광평공의 후손이라는 말도 있다.[1]
조선 정조 때 일부 족인들은 왕씨로 환성했다.[2]
7. 집성촌
개성 왕씨의 집성촌은 다음과 같다.
8. 인구
연도 | 인구 | 가구 수 |
---|---|---|
2000년 | 19,808명 | 6,148가구 |
2015년 | 22,452명 |
참조
[1]
웹사이트
왕씨(王氏) 본관(本貫) 개성(開城)입니다.
http://www.findroot.[...]
2022-09-23
[2]
웹사이트
문서뷰어
http://kostat.go.kr/[...]
2022-09-23
[3]
간행물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4]
웹사이트
문화콘텐츠닷컴, 송악군
http://www.cultureco[...]
[5]
뉴스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46> 진주강씨·신천강씨 등
http://m.segye.com/v[...]
세계일보
2013-04-02
[6]
서적
今後王氏之裔, 或自現, 或爲人見告者, 竝聽自願居處, 以安其生.
http://sillok.histor[...]
태종실록
141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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